작성일 : 14-01-12 11:45
제자백가 (2): 동양철학, 만병통치약에서 ‘고전학’으로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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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 (2): 동양철학, 만병통치약에서 ‘고전학’으로

<논어>가 재미없는 까닭

<논어>에서 공자가 하는 첫 마디 말은 이렇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한국에서 사는 사람, 혹은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대개 살아가면서 몇 번쯤은 듣게 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만나는 그 공자는 배우는 것의 기쁨을 말한다. 나중에 그의 후학(後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송(宋) 나라 때의 주희(朱熹)는 그의 선배 정이(程頤)의 말을 빌어 그 기쁨을 설명한다. 공자가 말하는 기쁨은 마치 어린 새가 날갯짓을 통해 날아다니는 법을 배우는 것에 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둥지에 웅크려 있다가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자라던 어린 새가 자신의 날개를 퍼덕이며 처음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 순간의 황홀한 기쁨처럼, 공자는 삶의 기술로서 ‘예’(禮)를 배우고 익혀나가는 과정이 주는 기쁨을 노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적어도 내가 동양철학을 강의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경우는 공자의 말에 대개 시큰둥하다. 현대 한국인에게 ‘배운다’는 것은 기쁨을 주는 것과 무관하다. 그러니 <논어>가 잘 읽히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당연함을 인정하는 사람 또한 드물다. 공자는 여전히 죽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대인 가운데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한 살아있는 인물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조차  <논어>는 여전히 가장 권장되는 ‘고전’이며, 그는 이천 몇 백 년 이상이나 최고의 권위를 갖는 스승으로서 지금껏 존경받고 있다. 이런 얄궂은 상황의 주인공이 바로 공자이고, 그의 어록인 <논어>가 처한 현실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얄궂은 상황이 일어난 것일까? 존경한다면서 읽지 않는 그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논어>는 이제 재미없는 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어>는 본래부터 철학책이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하고 지당한 말씀만 늘어놓는 책이기에 재미없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따진다면, 영문법 책이나 수학의 정석과 같은 책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이고, 육법전서와 같은 두툼한 책은 더더욱 재미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책들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를 쓰며 읽고 외운다.

<논어>는 본래부터 재미없는 책이다. 하지만 <논어>는 막강한 힘을 가진 책이었다. 그래서 재미가 없지만 사실 쏠쏠한 책이었다. 그로 인해 벼슬을 하고,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에게 호령할 수 있는 그런 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힘이 사라지지 이제 <논어>는 그 재미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논어>가 재미없는 까닭은, 바로 이런 데에서 온 것이다.

동양철학은 만병통치약인가

동양철학이 처한 현실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동양철학’ 책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를 낸다. 인간의 삶을 소외시키며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여 결국 인류를 파멸의 위기로까지 내몰고 있는 서구 근대문명의 폐해를 치유할 해결책이 바로 ‘동양철학’에 있다는 그 소리이다. 이해타산적인 이성이 초래한 도덕의 퇴보를 치유할 지혜는 <논어>에 있고, 인류의 터전인 자연을 파괴한 과학기술의 역기능을 제어할 삶의 지혜가 <노자>에 있다는 이야기는 늘 듣는 레퍼토리였다.

심지어 서구의 페미니즘 이론에 식상해진 어떤 이들에게는 <노자>가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되고, 산업 문명이 초래한 가족의 해체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다시 효(孝)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렇게 ‘서양 대 동양’이라는 도식 속에서 서양은 문제의 원인이고 동양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귀결하는 논리는, 20세기 동양철학 논문이나 책이 의지하는 최고의 형식논리가 되었다. 그래서 동양철학은 ‘만병통치약’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더욱 이상한 모습은, 이러한 동양과 서양의 대결의 도식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에 대한 서술에서도 똑같이 재연된다는 점이다. 서구의 도구화된 이성에 비해 유가는 따뜻한 인간애(仁)와 도덕성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 유가는 <노자>나 <장자>를 통해 인위와 강제를 수반하는 억압적 문명(文明)의 대명사처럼 비난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유교(儒敎) 혹은 유학(儒學)은 도덕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파괴자라는 야누스적 존재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동양철학은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서구의 근대가 초래한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동양철학’에는 있다. 꼭 해답은 아닐지라도 그 해결의 실마리는 분명 있다고 한다. 아니면 분명 있기는 한데, 아직 우리가 찾지 못하고 있거나 우리의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동양철학에 더 커다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온다. 이제 서구 문명의 폐해를 치유할 해결책을 서구는 자신에게서 찾는 데 실패했으니, 동양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동양철학, 다시 ‘고전학’으로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동양철학에서 서양철학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해결할 처방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은 찾을 수도 있고 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음 자체가 우문(愚問)이기에 그 답 또한 언제나 우답(愚答)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음 자체가 적절하지 않을 때, 그 답은 대답하나마나 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의 미해결 과제에 답을 줄 수 있는가를 묻기 이전에 동양철학의 전근대성이 과연 탈근대와 동일한 것인가를 물어야 마땅하다.

동양철학은 처음부터 동양철학이었던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오늘날 ‘동양철학’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는 ‘고전’에 대한 재해석의 전통을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에 가깝다. 20세기 내내 애용되었던 무수한 ‘철학개론’ 서적에서 철학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으로 정의되었지만, 그렇게 해서 철학적으로 재해석된 내용이란  <논어>, <맹자>, <노자>, <장자>와 같은 고전에 대한 해석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철학은 일차적으로 ‘고전학’(古典學)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동양철학을 ‘철학’이 아닌 고전학으로 다시 돌리는 작업은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학이란 언제나 보편적인 물음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생각에 늘 골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古典’이란 ‘classic’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오래된’ 책이기도 하다. 고전은 인간이 언제나 삶에서 부딪히는 유사한 문제를 다룬다는 차원에서 시대를 넘어서기도 하지만, 오래된 언어와 말로 이루어진다는 차원에서는 낡은 책인 것이다.

동양철학은 이제 다시 고전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른 한편 동양철학을 고전학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그것이 지닌 본래의 맥락을 회복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 속에는 오래도록 역사의 시련을 겪으며 그 빛을 발현하는 의미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것을 구성한 언어와 생각은 역사의 오랜 흔적들로서 이미 빛이 바랜 것들에 감추어져 있다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다. 보편성을 강조하는 철학의 이름 아래에서 그 낡음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가 아니고 과학과 다른, 쿠플레의 <중국 철학자 공자>(1687)

그렇다면 공자는 어떻게, 그리고 왜 철학자가 되었던 것일까? 공자가 철학자가 되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측면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공자가 본격적으로 서구 사회에 소개된 1687년, 그의 이름은  <중국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를 통해 정해졌다. 기독교 전교사들이 라틴어로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는 결코 종교적 지도자일 수 없었으며, 기독교와 과학의 대립이라는 틀에서도 안전할 수 없었다. 공자가 종교적 성인이라면 전교사들의 동아시아 전교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종교와 무관한 철학자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사람의 배우는 목적은 분명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합리적 영혼인 영적인 능력을 덕을 통해 환히 드러내어 동물적 성향으로 인해 흐려진 그 정신적 능력을 본래의 밝음으로 되돌리는 데 있다.”(The purpose of the learning of great men consists in illuminating spiritual power by means of virtue, that one may receive from heaven, certainly a rational soul, so that this may be returned to its original clarity, as the animal appetites have beclouded [them].[1662], 258쪽)

<중국의 지혜Sapientia Sinica>는 1662년  <대학>의 첫 구절,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止於至善’을 라틴어로 위와 같이 번역한다.

“더욱이 1대인이 2배우는 3목적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6합리적 7본성을 5다듬고 개선함으로써 왜곡된 욕망으로 생긴 얼룩을 깨끗이 닦아내어 투명한 거울처럼 최초의 본성의 맑음으로 되돌아가는 데에 4있다. 다음으로 [대인의 배움의 요체는] 스스로 모범을 보여 10백성을 9새롭게 하는 데에 8있다. [대인의 학문의 요체는] 그 다음으로 13지극한 14선에 15확고히 서 있거나 그것을 유지하는데 11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주석가들이 통치 행위들이 모두 올바른 이성과 합치되기를 바랐다고 나는 이해하였다.”(Moreover, the 3 purpose of the 2 learning of 1 great men 4 consists in 5 refining or improving the 6 rational 7 nature, that one may receive from heaven, so that certainly this, as if a most transparent mirror, by means of wiping away a blemish of deformed appetites, may be returned to its pristine purity. [The learning of great men]  8 consists next in 9 renewing or reviving the 10 people, certainly by means of one’s own example and exhortation. [The learning of great men] 11 consists next 12 standing firm, or preserving in the 13 greatest 14 good by which I understand that the interpretaters wished all the greatest actions to be in conformity with right reason. 278쪽)

이로부터 25년 뒤인 1687년에 쿠플레 등 17명의 예수회 선교사가 번역하여 펴낸,  <중국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의 <대학>의 첫 구절은 위와 같이 번역되어 있다. <중용>의 첫 구절 또한 다음과 같다.

“하늘에 의해 인간 속에 자리 잡은 것을 합리적 본성이라 한다. 그것이 자연을 따르거나 모방하기 때문에 그것을 법도라고 부르거나 또는 이성과 조화된 것이라고 한다. 이 법도를 부지런히 반복하여 실천하고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규제하는 것을 가르침 또는 덕의 배움이라고 한다.”(That which is placed into man by Heaven(t’ien ming) is called the rational nature(hsing). Because this is fashioned by means of nature and imitates it, it is called a rule(tao) or is said to be in harmony with reason. Repetition to the point of diligently practicing this rule(hsiu tao) and one’s own regulating of it is called education(chiao) or the learning of virtue., 284쪽)

다른 한편 근대 이후 과학과 첨예한 갈등 관계에 있었던 기독교의 입장에서 철학자 공자는 과학과도 구분되는 성격을 가져야 했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이미 17세기 서구 유럽에서 철학자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철학자가 된 공자는, 전통 사회가 몰락하게 되면서 더 이상 현실적 이념으로 자리잡을 수 없었던 유가 전통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철학자 공자는 종교가 아니면서 또한 과학과도 거리를 두는 철학자로서 생존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동양철학을 생각할 때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1923년 중국 대륙에서는 ‘과학과 인생관’ 논쟁이 폭발했는데, 베이징 대학교수 장 쥔마이(張君勱)는 ‘인생관’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과학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라면, 인생관은 주관적이고 직관적이며 종합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과학은 인과론에 지배되지만 인생관은 자유 의지적이기에, 과학이 인간의 삶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20세기 후반 한국의 동양철학의 성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생각이었다.

20세기 내내 동아시아 사회는 서구의 ‘과학’(natural sciences)과 ‘민주’(democracy)라는 두 가지에 환호하면서 이를 수용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철학은 그러한 역사적 대세 속에서 과학을 적극 수용하고 소화하는 노력은 미흡했다. 동양철학은 오히려 과학과 거리를 두면서 형이상학과 존재론, 인식론과 윤리학이 철학의 본령이라 여기면서 거기에 골몰하였다. 현상과 현실은 과학이 다룰 부분이지 철학이 다룰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한국의 동양철학은 과학과의 소통에 적극적이지 않은 듯하다.

탈근대와 전근대의 착종을 넘어

20세기 동아시아가 열렬히 추종하였던 과학에 대해서는 물론 동양철학은 ‘민주’의 가치를 수용하는 데에도 상당히 서툴렀다. 이러한 점은 동양철학의 성격이 아직껏 ‘경학’의 차원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마치  <성서Bible>는 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 점의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기독교의 주장처럼, ‘경전’의 말씀들은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래서 모든 ‘고전’들은 철학의 이름으로 비판이 아닌 옹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에 대한 태도는 동양철학의 건전한 비판정신을 제대로 꽃피우는 일을 지체시켰다. <장자>에서 ‘성인’(聖人)을 말하는 부분의 한 대목은 이렇다. 이 성인은 도(道)와 덕(德)을 온전하게 갖춘 이상적인 인간형으로서,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의 폐해를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해석된다.

[성인은] 자신의 삶을 세상에 맡겨서 백성들과 함께 나란히 걸어가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멍한 모습으로 순박함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지라 일의 효과와 이익, 기계와 기교 따위는 반드시 그의 마음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같은 사람은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고, 자기의 마음이 원치 않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아서 비록 온 천하 사람들이 칭찬하면서 그가 하는 말이 옳다 해도 오연(傲然)히 돌아보지 아니하고, 온 천하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면서 그의 생각을 잘못이라 해도 태연히 들은 체하지 않는다. 온 천하가 비난하고 칭찬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손익(損益)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일컬어 내면의 덕이 온전히 갖추어진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 같은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처럼 남의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는 인간[風波之民]이다.”(안병주․전호근, <역주 장자 2>, 186-7쪽)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읽으면서, 학자이건 일반 독자이건 상관없이 무언가 긍정적인 언술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전통 고전의 내용은 의미있는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장의 주어 ‘성인’을 바꾸어 놓을 때 그 내용은 전혀 달리 보인다.

[성인 혹은 오늘날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고, 자기의 마음이 원치 않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아서 비록 온 천하 사람들이 칭찬하면서 그가 하는 말이 옳다 해도 오연(傲然)히 돌아보지 아니하고, 온 천하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면서 그의 생각을 잘못이라 해도 태연히 들은 체하지 않는다. 온 천하가 비난하고 칭찬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손익(損益)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일컬어 내면의 덕이 온전히 갖추어진 사람이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대통령을 두고서 ‘덕이 온전히 갖추어진 사람’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이름이 ‘성인’인 까닭에 그가 어떤 의미 있고 바람직한,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어떤 인간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듯이 읽고 해석한다. 사실 동양철학의 어떤 논의들은 이와 같이 전근대적인 것을 탈근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동양철학의 성립 과정을 잘 살피다 보면, 오늘날 동양철학이 보이는 현실에 대한 무기력증은 동양철학의 역사적 과정에서 잉태되어 온 것들이다. 인문학의 위기 때문에 동양철학의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동양철학이 변화하는 현실에서 능동적으로 우리의 현실과 삶에 소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위기가 온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일까?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2, No.1, 2014년 1월, 김시천, 경희대학교 교양교육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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