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중국의 전국시대. 천하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시대였던지라 군비의 확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다. 당시 전투 형태는 주로 전차전이었다.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에 세 명의 전사가 탄 후 이들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따라서 수레를 몇 대 보유하고 있느냐는 예컨대 지금 탱크나 전투기를 몇 대 보유하고 있느냐와 똑같은 말이었다. 수레를 보유할 수 있는 대수가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정해졌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하여 절대 지존인 천자는 만 대까지 소유할 수 있었고, 천자로부터 일정 지역의 통치를 위임받은 제후들은 천 대 이하를, 제후의 신하인 대부 계층은 백 대 이하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질 좋은 말을 확보하는 것은 전투의 승패는 물론 천자뿐 아니라 제후들에게도 국운이 달린 중차대한 일이었다.
논리와 현실의 사이를 파고들기
당시 중원의 북쪽에 위치한 조(趙)나라에 공손룡(公孫龍)이라는 궤변론자가 있었다. 그는 명가(名家)가 불리는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그의 조국 역시 허구한 날 이웃 나라와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이라 군비 확충에 열심이었다. 특히 조나라는 북쪽으로 유목민족과 접해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좋은 말을 비교적 쉽게 들여올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은 말을 자기들만 갖고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혹 큰 이문을 남기기 위해 누군가가 남몰래 말을 들여와서 옆 나라에 판다면? 사정이 이렇다보니 조나라의 조정은 말의 밀수를 막는 데에 진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경의 관리가 삼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변경수비대는 여느 때처럼 성곽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늠름하게 생긴 흰말 한 마리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른 장부를 꺼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들여온다고 신고한 말 중에 흰말은 한 마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저 흰말과 그 주인은 대체 뭐란 말인지…. 얼른 말 주인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서 보니 아뿔싸! 그는 궤변론자로 이름 높은 공손룡이었다. ‘성가신 일이 생겼군!’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어찌 된 사단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뭐가 문제기에 이 난리냐는 표정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다그쳤던 쪽이 도리어 당황해지기 마련이다. 하는 수 없이 병사들은 관련 규정을 내보이며 신고 없이 말을 들여오는 것은 중죄에 해당한다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공손룡은 그래서 난 아무 죄가 없다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규정집에 ‘말’을 들여오려면 사전에 허가 받으라고 되어 있지, 어디 ‘흰말’을 들여올 때도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흰말’은 ‘말’이 아니랍니다.” 중국지성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이 세상에 선포되던 순간이었다.
물론 지극히도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병사들조차 “여기 흰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말이 없다고 할 수 있나요?”라고 바로 받아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손룡에겐 준비된 말이 있었다. “그럼 흰말을 구해오라고 했는데, 고동색 말을 구해와도 될까요?” 이건 예나 아니오 어느 쪽으로 답해도 곤란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또한 예, 아니오 어느 쪽으로 답하든 질문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공손룡은 대화의 주도권을 틀어줬다. 언변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이재(理財) 또한 빼어났던 셈이었다.
논리적으로 깨어 있음의 힘
그래서인지, 공손룡과 같은 명가(名家)들에 대한 역대의 평가는 결코 후하지 못했다. 요컨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유려한 언변으로 포장해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내세운 모토와 공자가 내세운 모토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공자는 위(衛)나라의 재상이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이냐는 제자 자로(子路)의 기대 어린 물음에 “이름값을 바로 잡을 것이니라[正名].”고 간명하게 대답했다. 이름을 바로 잡아야만 사회가 질서정연하게 굴러갈 수 있고, 그럴 때만이 백성들은 맘을 놓고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된다는 논지이다. 명가 역시 혼란해진 사회를 바로잡아 질서 잡힌 사회로 되돌리자는 의도에서 ‘정명(正名)’을 언급한다. 물론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공자가, 정명이 결과적으로 가져오는 선한 효과를 환기하며 그 필요성을 강조했다면, 명가들은 어떤 상태를 정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데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가 화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서로를 강화시켜 주는 방향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크다.
따라서 이들을 부정적 뉘앙스가 물씬 풍기는 궤변론자로 몰아가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백마비마론만 해도 그렇다. 실은 사물(말)과 속성(흼), 전칭(全稱)명제와 특칭(特稱)명제에 관한 논리학적 관심에서 제기된 주장이었으나, 명가를 궤변론자로 몰아가고자 하는 세력에 의해 위와 같은 이야기가 사후적으로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추상적 가능성은 설명되는 대상이 아니라 설명하는 주체에 관심을 갖는다. 대상은 단지 가능한 것, 사유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추상적으로 가능한 것, 사유될 수 있는 것은 사유하는 주체에게 어떤 장애나 한계가 되지 않으며, 어떤 걸림돌도 아니다. …… (대상이) 과연 현실적인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1)
칼 마르크스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 말이다. 뭔가의 대상을 사유한다 함은 곧 ‘사유하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현실적인가의 여부는 부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에서는 흰말이 있으면 분명 말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흰말은 말이 아니라는, 곧 논리적으로 구성 가능한 명제인 “‘희다’와 ‘말’이라는 두 개의 범주로 구성된 ‘흰말’은 하나의 범주로 구성된 ‘말’과 다르다.”는 언명이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람에겐 ‘유비(類比)’의 능력이 갖춰져 있다.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큰곰자리나 사자자리 등을 구성해낼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능력이며, 자연법칙을 응용하여 사회규범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따라서 사유 가능한 모든 경우를 논리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결코 관념의 유희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현실에 대해 무척 민감하다. 현실에 밝은 이가 반드시 논리에 밝은 건 아니지만, 논리적으로 깨어있는 이는 현실적으로도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K. Marx. 2001.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고병권 역. 서울:그린비, 2001), 46쪽.
【관련 원문과 해석】
❍ “백마는 말이 아니다고 할 수 있는가?” 대답하였다. “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대답하였다. “‘말’이란 것은 형상에 붙인 이름이고, ‘하얗다’란 것은 빛깔에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빛깔에 붙인 이름은 형상에 붙인 이름과 다르니 백마는 말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 백마가 있음에도 말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말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도 말이 아니라고 하는가? 백마가 있으면 말이 있는 것인데 희다고 하여 말이 아니라고 함은 어째서인가?” 대답하였다. “말을 찾아오라고 하면 누런 말이든 검은 말이든 간에 아무 거나 데려오면 된다. 그러나 백마를 찾아오라고 했을 때 누런 말이나 검은 말을 데려오면 안 된다. 백마더러 말이라고 하는 경우는 구하는 바의 범주가 말 하나인 경우로, 구하는 바의 범주가 말 하나라면 백마도 말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나 구하는 바의 범주가 다르면, 예컨대 누런 말과 검은 말이 어떤 때는 데리고 와도 되고 또 어떤 때는 데리고 오면 안 되니 왜 그러하겠는가? 되고 안 되고는 그 형상이 다르기 때문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누런 말과 검은 말을 하나의 범주로 본다면 당연히 말이 있다고 할 수는 있어도 백마가 있다고는 할 수 없게 되니, 곧 백마가 말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白馬非馬, 可乎.” 曰, “可.” 曰, “何哉.” 曰, “馬者, 所以命形也. 白者, 所以命色也. 命色者, 非命形也, 故曰白馬非馬.” 曰, “有白馬, 不可謂無馬也. 不可謂無馬者, 非馬也. 有白馬爲有馬, 白之非馬, 何也.” 曰, “求馬, 黃黑馬皆可致.求白馬, 黃黑馬不可致. 使白馬乃馬也, 是所求一也, 所求一者, 白者不異馬也. 所求不異, 如黃黑馬有可有不可, 何也. 可與不可其相非, 明. 故黃黑馬一也, 而可以應有馬, 而不可以應有白馬, 是白馬之非馬, 審矣.” - <공손룡자(公孫龍子)> 「(백마론白馬論)」.
❍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제후가 선생님께 정사를 맡기고자 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반드시 이름값을 바로잡을 것이다.” 자로가 대꾸했다. “고작 그것입니까? 선생님께서는 세상 물정에 어두우시군요. 어찌하여 그것을 바로잡으신다고 하십니까?” 공자가 답했다. “거칠기 짝이 없구나, 자로야! 군자는 자신이 모르는 바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있어야 한다. 이름값이 바로잡히지 못하면 말이 순통치 못하게 된다. 말이 순통치 못하게 되면 일이 성취될 수 없다. 일이 성취될 수 없으면 예악이 흥성치 못하게 된다. 예악이 흥성치 못하게 되면 형벌이 마땅함을 잃게 된다. 형벌이 마땅함을 잃게 되면 백성들은 어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군자는 이름을 붙였으면 반드시 말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하며, 말로 규정하면 반드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자신의 말에 대해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錯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已矣.”) - <논어(論語)> 「자로(子路)」.
* 이 글은 동일한 제목으로 <사과나무> 2005년 6월호에 게재한 것을 수정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1, 2015년 1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