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는 일곱 빛깔일까 아니면 다섯 빛깔일까? 소리를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의 8음계로 나누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궁, 상, 각, 치, 우’의 5음계로 나누는 것이 맞을까? 다소 기대와 엇나갈지 모르겠지만, 어느 것이 맞는가를 따져보기 위해 이런 문제를 던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만물을 감쪽같이 속이는 말의 본성을 살펴보고자 던져본 것이다.
양자택일 식 질문의 비밀
언어는 투명하지 않다. 겉으로는 사회적 이해관계와 무관한 양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인구 300명인 마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마을 현안에 대해 주민투표를 했는데 결과는 찬성 100명에 반대 200명이었다. 이를 두고 A신문은 “찬성 1/3, 반대 2/3”라고 보도하였고, B신문은 “찬성이 반대의 반밖에 안 돼!”라고 보도하였다. 한편 C신문은 “반대, 찬성의 두 배!”라고 보도하였다. 분명 동일한 현상을 다룬 것이지만 그 느낌과 뜻은 사뭇 다르다. 전자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중립적으로 전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반대보다 찬성이 훨씬 적다는, 반대로 찬성보다 반대가 훨씬 크다는 인상을 준다.
표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낱말의 조합과 선택, 문장의 구성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퐁당퐁당’과 ‘풍덩풍덩’에서 받는 느낌이 다르고, “아~, 그 사람!”이라고 할 때와 “아~, 그 인간!”이라고 할 때의 뉘앙스가 다르다. “나는 고전을 읽고 있어.”라는 말을 “고전을 나는 읽고 있어.”라고 바꾸면, 같은 낱말로 구성된 문장임에도 그 쓰임새와 의미가 자못 달라진다. 이렇게 보면 말은 하고 싶을 때 그냥 입만 열면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못 느껴서 그렇지 말은 낱말의 선택부터 배열에 이르기까지 결코 단순치 않은 ‘제조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그런데 말이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임을 잘 아는 이들이 있다. 이를 잘 알기에 그들은 말을 음흉하게 조작할 수도 있다. 양자택일 식의 질문도 그런 경우의 하나이다. 통상 질문을 하는 쪽은 능동적이고, 답변을 요구받은 쪽은 수동적이게 된다. 특히 상대적 강자가 질문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가령 “교과서 국정화는 옳은가 그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가령 국가검인정제나 자유발행제, 나아가 별도의 교과서가 없는 제도 등 다양한 측면에서 교과서 문제를 검토하기보다는, 주로 “교과서 국정화를 해야 하는가, 그러면 안 되는가”의 자장에서만 따져보게 된다. 아무런 의도도 숨겨져 있지 않은 듯하지만, 실은 질문자는 자신이 설정해놓은 폭 안에서만 답변할 것을 강요한 셈이다.
문제는 살아가면서 이런 유형의 질문에 지속적으로 봉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문제를 내는 자의 위치가 아니라 푸는 자의 위치에서 질문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문제를 문제 삼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출제자의 의도 거스르기!”가 그것이다. 둘 가운데서만 생각해보라는 출제자의 의도를 거슬러 “왜 하필 그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하는가,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식으로 되물으면 된다. 이름하여 “문제를 문제 삼기!” 전략이다. 문제 역시 말로 구성된 것이기에 어떻게 표현되는가에 따라 상당량의 속뜻과 속셈을 행간에 품을 수 있다. 게다가 말이 그렇듯, 문제도 사회적 이해관계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하여 주어진 문제의 답을 찾기에 앞서 문제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를 이루고 있는 말의 행간에서 숨은 의도와 이해관계를 하나하나 캐내야 한다는 말이다. 무지개는 그저 빨간색이 아무런 단절 없이 그 다음 색으로 이어지고, 또 그 다음 색으로 자연스럽게 아어진다. 일곱 빛깔이니 다섯 빛깔이니 하는 것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그렇게 구분했을 따름이다. 소리 역시 그렇다. 사람이 그것을 다섯 음계나 여덟 음계로 구분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소리 그 자체는 아무런 단절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있다. 그럼에도 다섯 음계에 맞춰 들으라고 하면 그렇게 듣고, 여덟 음계로 들으라고 하면 또 그렇게 듣는다. “소리는 생각을 돌리는 바퀴”라는 서양의 오랜 통찰처럼 사람은 말하고 들은 대로 보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말에 그런 힘이 있는지를 잘 모른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말하고 판단하며 보는 줄로 안다. 그러나 언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갓난아이가 내는 소리를 두고 옹알댄다고 하지 말한다고 하지 않는다. 소리를 내고 있기는 하지만 무슨 뜻인지 파악이 안 되면 설사 발음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해도 말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뜻이 통할 때만 말이라고 하며, 뜻이 통하는지의 여부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원숭이가 되지 않으려면!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말을 ‘모어母語’라고 하지 않고 ‘모국어母國語’라고 한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르치는 말을 국가가 보증해준다. 이는 말이란 부모와 자식이란 자연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국가라는 사회적 차원에서 성립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또한 말에는 국가로 대변되는 제반 사회적 이해관계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말을 배운다는 것은 동시에 그런 이해관계를 익히는 것이며, 말이 통한다 함은 그런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는 소리가 된다. 심지어 말이 통한다는 이유 하나로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설정되기도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주변의 이민족을 ‘이적(夷狄, 오랑캐)’이라 부르며, 그들을 문명화된 중원과는 달리 동물처럼 야만의 공간에 사는 존재로 보았다. 살아 움직인다는 면에서는 인간과 오랑캐, 동물은 한가지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랑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다름없다는 관념의 소산이었다.
말이 지닌 힘이 이러하다보니 아예 말을 믿지 말라는 경고가 꽤 오래전부터 나왔다. 노자는 사물의 이름은 사물 자체와 무관하다고 설파했고, 장자는 말이란 본래부터 그 가리키는 바가 언제 어디서나 늘 일정하게 규정된 바가 없음을 일깨웠다. 그러니까 앞뒤 문맥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똑같은 말도 다르게 해석되거나 상이한 반응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문맥 속에서 결정되는 말’이니, 말 그 자체에 매몰되거나 현혹되지 말고, 그 말을 둘러싼 문맥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못하면 장자 말대로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반발하다 “조사모삼(朝四暮三 )” 하겠다고 바꾸니 환호작약하는 원숭이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무지개는 일곱 빛깔인가 다섯 빛깔인가”와 같은 질문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다섯 가지인가 일곱 가지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무지개를 왜 5색 혹은 7색으로만 규정해야 하는지를 되묻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문맥 곧 콘텍스트를 읽는 힘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내가 그것을 못 읽는다고 하여 남들도 그러하다고 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게다가 콘텍스트를 풍요롭고도 말이 되게끔 읽을 줄 아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악용한 사례는 동서고금의 역사에 다반사로 나온다. 다른 방도가 없다는 얘기다. 원숭이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말의 노예’에서 벗어나, 그것이 놓여 있는 콘텍스트를 너끈히 조감하는 사람이 되는 길 외에는!
【관련 원문과 해석】
❍ 오랑캐인 적인이 형나라를 침공하자 관중이 제 환공에게 아뢰었다. “융적과 승냥이, 이리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또한 중원의 제후국들은 혈연관계로 엮여 있으니 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안락과 맹독은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狄人伐邢, 管敬仲言於齊侯曰, “戎狄豺狼, 不可厭也. 諸夏親暱, 不可棄也. 宴安酖毒, 不可懷也.”) - <춘추좌전(春秋左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 무릇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말해진 바가 있어야 하는데, 그 말해진 바가 특정될 수 없으면, 과연 말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있었던 적조차 없었다고 해야 할까? 말은 새 새끼의 지저귐과 다르다고 여기는데 정말 다름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夫言非吹也. 言者有言, 其所言者特未定也. 果有言邪, 其未嘗有言邪. 其以爲異於鷇音, 亦有辯乎, 其無辯乎.)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 무릇 도에는 제한이 있은 적이 없고, 말에는 항상 똑같음이란 것이 있은 적이 없다. 이것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비로소 구분된다.(夫道未始有封, 言未始有常, 爲是而有畛也) - <장자> 「제물론」.
❍ 마음의 신령함을 활용하여보면 하나임을 알게 됨에도 그것이 동일함을 알지 못함을 일러 “아침에 셋”이라고 한다. 무엇을 “아침에 셋”이라고 하는가? 저공이 도토리를 주면서 말했다. “아침에 세 개이고 저녁에는 네 개다.” 그러자 뭇 원숭이들이 분노했다. 이에 저공이 다시 말했다. “아침에 네 개이고 저녁에는 세 개이다.” 그러자 뭇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일곱이라는) 이름과 실제는 바뀌지 않았음에도 기쁨과 노여움이 작동되었음은 또한 이러한 이치 때문이다.(勞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狙公賦芧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 <장자> 「제물론」.
* 이 글은 <사과나무> 2007년 2월호에 "투명하지 않은 말"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12, 2015년 12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