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명문사학 게이오 대학을 설립했으며, 메이지 유신을 비롯한 일본의 근대적 변화에 커다란 사상적 영향과 족적을 남긴 개화지식인이자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우선시한 반면 정한론을 주창하고 천황제를 옹호한 것으로도 알려진 문제적 지식인이다. 헤겔이나 니체가 그러하듯이 한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그로부터 다양한 학문적 전통을 펼친 사상가는 흔히 서로 양립하지 않는 모순된 얼굴을 갖게 되기 마련인데 후쿠자와 유키치가 바로 그런 사상가이다. 

 

이 책은 후대의 평가로 인해 정형화되기 이전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실제로 어떤 전통과 사회적 상황 속에서 무엇을 고민했고 서구로부터 온 외부적 충격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려 했는지 짧지만 다양하고 실증적인 전거들을 통해 살펴본다. 또한 이 과정에서 후쿠자와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일본 지식인들의 고민과 시대적 과제도 함께 엿볼 수 있으며, 서구라는 외부세계에서 도래한 것으로만 이해했던 근대적 정치 이념들이 유교적 전통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자기 학문의 엄밀함과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치열한 자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쓴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1875) 서문에는 “마치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사는 것과 같고, 한 사람에 두 몸이 있는 것과 같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이 말은 개국 이전의 폐쇄적인 사회와 개국 이후의 급속한 서양화 물결 모두를 경험한 사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그 경험이야말로 일본의 ‘문명화’라는 과제에 대처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그는 관리된 풍속과 강력한 통치기구는 ‘개화’의 실패로 이어진다는 문제에 대해 주도면밀히 검토했다. 후쿠자와는 일본이 표면적으로는 ‘일계만대一系万代’의 권위가 지배하는, 자유가 없는 국가로서 그 점에서만큼은 중국보다도 ‘아시아’적이지만, 실제로는 ‘이설쟁론異説争論’의 역사를 지니며 ‘자유의 기풍’을 항상 지녀왔다고 주장한다. 황실을 지존至尊으로 하고, 무가정권을 지강至强으로 함으로써 이 두 요소가 정치적 권위에 관해서 ‘다사多事’를 구성하여 왔기 때문에 ‘중국인은 사상적으로 빈곤하나, 일본인은 사상적으로 풍부하다. 즉 중국인이 무사無事라면 일본인은 다사多事이다.’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일본에 ‘봉건’제도가 오래 지속된 덕에 ‘분권’적인 정치적, 사회적 관습이 정착하였고 그것이 ‘자유의 기풍’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근세 일본(혹은 그 밖의 동아시아 여러 나라)과 같이 의회나 인민투표라는 제도가 없는 사회 즉, 민주주의 정치 체제 모델조차 역사 속에서 갖지 못한 사회에서는, 물론 일반인들의 정치적 의견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려고 제도를 만들 필요까지 느끼지는 못했다. 그것(일반인들의 정치적 의견)은 대개 ‘민심’이라고 불렸다. ‘민심’은 원래 중국의 전통사상에서 중시된 개념이었다. 당시는 ‘민심’을 따르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근세 일본에서도 ‘민심’을 가라앉히고 순종적으로 만드는 일은 통치자가 무엇보다도 마음 써야 할 항목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유학자들에 의해 조상제사가 ‘민심’ 안정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의례儀禮에 의해서만이 제대로 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말기 미토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斎(1782~1863)는 일본의 어리석은 민이 외국의 가르침에 속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천황가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민심을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외적인 위기를 맞았을 때는 ‘민심’의 일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일치는 개인들의 강한 ‘정치의식’에 의존한다. 즉, 정부의 책임과 권한을 존중함과 동시에 어떠한 사정이 있어도 개인의 자유에 대해 자의적으로 (즉 법에 기초를 두지 않고) 침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 바로 그것이 정치의식의 기초, ‘민심’의 기초이다.

후쿠자와는 헌법과 의회가 일본의 국가제도상에서 본래부터 바람직한 원리로 간주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즉 ‘민심수습’의 장치까지 포함해 헌법과 의회는 이미 일본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제도적 지혜였으며, 일본 국민에게 암묵적으로 양해되어 왔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체제는 ‘전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원화된 권력 주체가 상호간에 경쟁하고, 억제하는 체제였다고 말한다. 또 후쿠자와는 도쿠가와 체제를 평가하면서 국가를 통합하는 권력은 실은 다양한 여러 권력주체의 ‘평균’에 있다고 했다. 또 권위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분권적인 ‘봉건’제도가 역설적으로 국민의 자치 습관을 낳았으며 이것이 또 메이지 국가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한다. 

 

후쿠자와는 서구의 경제교과서를 번역하면서 ‘competition’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고심한 끝에 ‘경쟁’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확실히 ‘경쟁’이란 당시의 유교적인 교양층에게 너무 자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일본에서뿐만이 아니다. 유교적인 윤리관에서 ‘쟁’이란 글자를 혐오했던 예는 조선의 지식인들에서도 보인다. 이 용어는 흔히 오늘날 자유시장주의 원리에 입각한 사익 추구의 경쟁이란 의미만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후쿠자와에게 이 말은 개인의 인격적 도야, 집단의 명예라는 가치를 두고 서로 겨루는 모양새를 이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경쟁’ 그 자체가 동기가 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나 행위에 도움을 주니까 긍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쟁’이야말로 인간이 사회와 관계 맺게 하고 생기 넘치는 인격을 갖게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경쟁’이 개인의 인격을 고매하게 만들고, ‘공’에 헌신하는 자세를 낳는다는 논리는 얼핏 서양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서 빌려온 논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교의 교육론에도 그와 같은 요소가 있다. 자신을 드높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그들을 도덕적인 완성으로 이끄는 동기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특히 주자학과 친연성을 갖는다. 

 

후쿠자와가 서양 문명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유교의 역사적 역할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 예로 <문명론의 개략> 제3권 제6장 ‘지덕知德의 변’이라는 장에서 후쿠자와는 ‘지혜’와 ‘덕의德義’의 작용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지혜’와 ‘덕의’가 일본에서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탓에 ‘지혜’는 물질적 이익, ‘덕의’는 일상도덕이라는 잘못된 구분이 행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덕의의 하나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들면서 ‘극기란 개인적인 욕심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고 복례란 자신의 본마음으로 돌아와 분수를 아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후쿠자와는 ‘본마음’에 의한 강한 자기규율을 보편적인 도덕 가치로 본 듯하다. 더욱이 후쿠자와는 ‘본마음’이라는 말을 인간의 본질적인 도덕 의지라는 의미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학문을 권함>(1874)에서 ‘사람에게는 각각 지성至誠의 본마음이 있나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프랜시스 웨이랜드Francis Wayland, <The Elements of Moral Science>(1835) 가운데 “the Authority of Conscience”라는 절의 개요이다. 본마음은 영어인 conscience의 번역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후쿠자와는 내면의 의지로서 자기 욕망을 억제하고 사회적인 활동력을 강화하여 또 다시 그 의지력 자체를 강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주창하였지만, 그것에 관해서라면 주자학적인 수양론으로부터도 많은 부분을 흡수했음이 분명하다.

 

후쿠자와는 왜 ‘미개’한 사회에서는 사익을 희생해서라도 도덕규범에 따르게 하려는 정치적, 사회적 압력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적인 경제나 도덕이 향상되지 못하고 위선과 태만이 만연한지에 관한 문제에 주목했다.

후쿠자와는 ‘미개 사회’에서 ‘도덕’으로서 존중받는 것이 실은 좁은 인간관계 안에서 상찬받으려는 사심에 바탕한 ‘사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후쿠자와의 도덕론은 인간의 도덕적 향상이 그 사람의 내면적인 노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본 점에서 의외로 주자학의 공부론과 닮았다. 다만 후쿠자와는 사람들의 사회활동과 관계가 다양해짐으로써 개인이 지닌 가치관도 다원화되고, 그것들 각각이 존중받아 사람들의 다양한 능력이 발휘되면 그것이 문명화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또한 개인이 자신을 사회적 존재, 감정이나 인생의 목적에서 동포들과 조화를 이루려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는 사상이야말로 ‘최대행복원리’라는 공리주의 도덕의 근거라고 한 밀의 사상을 후쿠자와는 주장하였다. 그가 공리주의에서 발견한 것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사회적 공감이란 본성이었다. 즉 후쿠자와는 ‘행복’과 사회성이 본래부터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후쿠자와가 관심을 가졌던 서구의 입헌국가는 단지 수입품이 아니라 일본 역사에 내재되어온 자치와 봉건에 기반을 둔 정치 체제였다고 주장한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주장은 일본이 ‘유전’적으로 동양적 전제의 전통과 다르니 안심해도 된다는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과 자치에 의해 운영되어 온 전통이 일본 사회에 있으니 이를 의제擬制 (fiction)로 받아들여 그것이 함의하는 바를 가지고 민족주의를 갱신해 자유로운 정치 체제로 나아가며 또 그러한 정치 체제에 대하여 책임있는 자세를 갖도록 노력하자는 호소로 이해할 수 있다. 

후쿠자와는 민족주의나 역사를 ‘픽션’으로 간주해 논의함으로써 개인의 권리나 존엄을 권력투쟁이나 권위주의 또는 무의미한 자국중심주의로 환원해 버리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정치 체제를 뒷받침하는 견고한 의지의 기초에 그것들(민족주의나 역사)을 두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후쿠자와 유키치는 유교의 전통 속에서 서구의 근대정치 사상과 이념을 학문적 엄밀함으로 자기화한 독보적 사상가였다.

 

역자후기/ 색인        

일본 히로시마 출생.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 졸업, 동경도립대학 사회과학연구과에서 ｢陸羯南における《政論》の方法と明治二◯年代の《政治社会》｣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江戸の知識から明治の政治へ󰡕로 산토리 학술상 수상, 케임브리지 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릿교(立教)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 미학과와 동대학원 <예술과 사회> 분과에서 주로 예술과 정치, 정치와 윤리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공부하였으며, 현재는 고양국제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서 글쓰기와 미학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는 <마크 로스코>,<제임스 앙소르>가 있다.